중 국 매 트 왕 리 성 일
중 국 매 트 왕 리 성 일
- 광주모드모아주식유한회사 리성일 리사장의 창업사
(작자 박문희 한정일)
제일 성공한 《동북내기》
광동에서는 《남하(南下)》한 동북내기들 중에 가장 성공한 기업가는 리성일(李成日) 이라고 말한다.
《중국의 매트왕(中國地垫王)》이라 불리우는 리성일의 광주 모드모아주식유한회사 (廣洲夢都美股分有限公社)는 현재 총재산이 2.3억원, 년간 생산액이 1.5억원, 년리윤세금액이 2,000만원에 달하는 그룹으로 발전하였다.
제품인 《홍분가인( 紅粉佳人 )》, 《가거상반 (佳居相伴)》 등 수십가지 매트계렬은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등 41개국에 수출되고 있으며 국내 대도시들에도 1,300여 개 판매망을 확보하고 있다.
회사 산하에는 광주번우 (光州番禹) 모드모아매트유한회사, 번우 모드모아기계제조 회사, 광주모드모아침대용품유한회사, 모드모아그룹 장춘지사가 있다.
하지만 어떤이들은 이를 《보수적 수자》라며 《만약 현재 국영기업의 계산법으로 환산한다면 무형자산까지 10억원은 될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른바 무형자산이란 전매기술, 브랜드지명도, 세계각지 판매망과 기정시장 같은 것을 념두에 둔 것이다.
그러나 10년 전, 개방물결에 휘말려 광주에 천방지축 내려갈 때의 리성일은 돈도 인맥도 없는 혈혈단신이였다. 야심찬 꿈 하나만 달랑 안고 떠난 길림시의 34세나는 조선족젊은 청년이였다. 바다로 떠나는 한알의 모래알처럼…
초 행 길 쓴 잔 뒤 의 단 맛
상계 입문의 첫 발자국은 식당경리였다. 한 향항보스가 100만원 투자로 식당을 꾸려놓고 리성일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식당은 얼마 못가 문을 닫고 말았다. 《재무지식이나 경영관리에 까막눈인데다 인맥까지 없으니 실패할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리성일의 뒤말이다.
다음으로 잡은 항목은 가소물로 만든 신형의 자전거방울이였다. 아무렇게 따져봐도 파악이 서는 항목이였다. 자전거 7억대를 굴리고있는 우리 거대한 자전거왕국에서 자전거 년간생산량은 무려 3000만대, 방울 하나에 10전씩만 떨어진다 해도 리윤은 저그만치 300만원!
급기야 차관을 내서 공장을 앉히고 방울을 생산했는데 질은 상등. 그런데 웬걸 샘플을 짊어지고 국내의 자전거공장들을 일주했지만 방울 하나 못팔고 빚더미에 나앉고 말줄이야.
실패교훈은 훗날 리성일의 성공에 밑거름이 되었다. 종래로 실패를 달가와하지 않는 리성일은 거듭되는 좌절속에서 와신상담의 실들메를 바짝 조였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매트(地 )가 날아들어왔다. 밑면이 고무로 되여 미끌지 않는 이 신형의 매트는 국제선진기술이라고는 하지만. 열사람이면 열이 다 반대였다. 자금, 브랜드지명도, 기술 등 아무런 우세도 없이 나선다는 것은 닭알로 바위돌을 치는거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러나 리성일은 시장조사팀들에 샘플을 한짐씩 지워 복주, 상해, 연변 등지로 내몰았다. 자기도 한짐 메고나섰다. 당지 백화의 매대에 서서 매트의 질, 가격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일일이 체크하게 했다. 그렇게 꼬박 보름동안씩 각지 백화매대에 서있게 했다.
팀들이 다시 광주에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떠날 때와는 정반대, 열이면 열사람이 다 찬성이였다. 충분한 시장조사를 통해 매트항목의 광활한 전망을 실감했다.
리성일의 재주를 들여다 본 한 한국보스가 이 《빚꾸러기》 에게 선뜻 돈을 내놓았다. 리성일은 대담히 100만원을 털어 매트전매기술을 사들였다. 설비도 사들이고 인차 생산에 착수했다.
1992년 매트를 주제품으로 하는 광주몽도미유한회사가 리성일 의 벅찬 꿈을 싣고 이렇게 우렁찬 고동을 뽑았다.
일단 결심만 하면 강유력한 추진력을 과시할줄 아는 리성일은 곧 닫는 말에 채찍질을 했다. 국내시장에서 금방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자 인차 국제시장을 넘겨다보기 시작했다. 자기의 제품이 그 어떤 바닥에 놓아도 전혀 미끌지 않는 매트(防滑地垫)의 생산항목 에서 국제선진기술임을 확인한 리성일은 어벌통이 크게 국제시장 진출 경로를 찾았다.
독일프랑크푸르트박람회 ― 세계실내용품 최대박람회에 과감히 도박을 걸었다. 몇십만원의 지참금을 내야 함은 물론 관례에 따르면 국가수출입총공사에서 이마를 튕겨가면서 특별선정한 국영기업만 참가할수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박람회였다.
여러 사람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리성일의 태도는 단호했다 ― 구매력이 제한돼있는 협소한 국내시장에서만 비비닥거릴것이 아니라 국제시장에 과감히 진출해야 한다. 민영기업도 조만간에 이 길을 걸어야만 한다. 수십만원을 때려넣고 국제시장을 배워오는것도 수확이다.
직접 박람회조직위원회에 신청서를 띄웠다. 뜻밖에 요청서가 날아왔다. 당시 중국에서 참가한 60여개 업체중 유일한 민영기업이였다. 중국 전시청은 4층에 있었지만 리성일의 전시매대는 구미나라 업체들과 나란히 1층의 노란자위위치에 버젓이 나섰다.
당시까지 중국수출입총회사를 거치지 않은 선례와 민영기업이 참가한 선례가 없은데다 사전 통보도 없었기에 박람회에 참가한 국내의 국영친구들한테서 《넌 도대체 어떻게 굴러온 놈이지?》하는 이상한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리성일은 그런것과는 관계없이 외국에서 매트주문을 한아름 안고 귀국했다. 일대 성공이였다.
수출물고가 트이자 주문이 눈송이처럼 날아들어왔다. 현재 매트는 미국, 일본, 중동, 구라파, 동남아 등의 무려 41개 나라에 수출되는 국제명품으로 되였다. 매달 매트의 매출액은 900만원에 달한다. 이로써 리성일은 세계 매트업계에서 패왕의 지위를 확립했다.
<세계적 패왕이 되어야 진짜 일인자>
《하면 일인자, 일인자가 되지 못할 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 선수같이 미끈한 근육질의 체격인 리성일은 천성적이다싶이 도전가, 모험가였다.
문화대혁명때 열혈청년들의 으뜸가는 선망목표였던 해방군에 들기 위해 천방백계를 다해 끝내는 농촌호구를 도시호구로 고쳐내고야 말았다. 길림시에서 교원사업을 할 때 불량배들이 늘 학교에 와 소동을 피웠는데 리성일이 몇번 주먹을 내들고 나선 뒤 부근의 깡패들은 학교에 얼씬도 못했다.
매트업종에서 세계일인자가 되기 위해 초창기부터 벌써 수백만딸라를 들여 세계상 가장 선진적인 쌍층 자동화매트 생산라인을 구입했다. 얼마 전 또 한 대를 수입해 매트업계의 패왕지위를 확고히 굳혔다. 이 기계는 현재 전 세계에 9대밖에 없는데 그중 아세아에는 3대(일본에 한 대 있음)뿐이다.
세계시장에 대한 리성일의 집착은 《세계적인 패왕이 되여야 진짜 일인자》라는 사유에서 비롯됐다. 그는 《민영기업은 보다 파격 사유로 세계시장진출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재형과 초지민의 전기적인 이국로맨스의 중매군은 다름아닌 리성일이다. 지금도 한국에 가면 안재형은 리성일을 꼭 자기 집으로 잡아끈다.
영화배우처럼 미남인 리성일은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고 신용과 의리를 금싸락같이 여기기에 그의 곁에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아무런 인맥도 없고 자금도 없는 동북햇내기가 중국에서 경쟁이 가장 치렬하다는 상업도시 광주에서 쨍―소리나게 일어설수 있은 그 까닭에 대해 리성일은 이런 말로 풀이한다.
― 두 다리와 입 하나를 가지고 박투했다. 남들이 하루 5키로 걸을 때 10키로를 걸었다. 남들이 하루 8시간 잘 때 나는 4시간 잤다.
― 남에게 답복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 있든지 꼭 해내고야 말았다.
― 친구가 날 버린적 있어도 내가 친구를 버린적은 없었다.
― 식당을 해 망했던 그 한국보스를 내가 다시 일어서게 했다. 들깨를 심어 망했던 농민들의 배상금도 약속했던대로 갚아주었다. 광주의 상계에서 나의 신용과 의리는 정평이 나있다.
리성일의 인격적매력은 수하에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들게 했다.
인재들은 달갑게 그와 고락을 함께 했으며 그와 함께 창업하는 것을 매우 큰 영광으로, 어주 값가는 일로 간주했다. 그들은 리성일을 보스이자 믿음직한 친구이고 사유가 통하고 호흡이 맞는 지기라고 평가한다.
리성일은 늘 《내가 오늘 성공할수 있은 것은 남쪽에 왕원학(王援學)이 있고 북쪽에 진전군(陳殿軍)이 있었기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두사람은 모두 한족인데 리성일의 좌우팔로 있으면서 회사의 발전에 대공을 세운이들이다.
북경출신인 왕원학녀사는 석사연구생으로서 특히 영어수준은 온 광주시내에서도 수준급이였다. 게다가 능력까지 뛰여나서 많은 거물업체들의 쟁탈대상이였다. 리성일이 광동성대외무역촉진위원회 상무대표로 사업할 때 그녀는 위원회 비서장으로 리성일의 상급이였다. 리성일이 업체를 꾸려놓고 《옛 상급》을 부르자 그녀는 선뜻 그에 호응했다. 현재 왕원학은 신태양그룹의 본부인 광주 및 남방 회사의 총책임자로 리성일의 오른팔 역할을 하고 있다.
진전군도 원래 북방의 국가기관에서 리성일의 상급으로 우월한 지위와 좋은 발전전망이 있었지만 리성일을 기꺼이 따라나섰다. 그는 지금 장춘모드모아유한회사, 장춘신태양유한회사를 책임지고있는데 리성일의 왼팔이 되고 있다.
국경 50주년 경축대회 천안문 성루에 올라
장춘신태양유한회사의 부총경리인 박기룡씨도 한고향사람인데 우월한 생활조건과 훌륭한 직업을 단연히 버리고 달려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리성일총재는 다정다감한 인정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대부자가 된 리총재는 항상 시간을 쪼개쓰는 형편이지만 해마다 음력설만 되면 꼭 고향에 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설을 쇱니다. 며칠간 고향사람들의 구들목에서 함께 뒹굴면서 통쾌히 회포를 풀고 술에 만취돼보기도 하지요. 그는 마을의 소꿉친구들이 어렵게 보내는 것을 보고 돈을 내서 6명을 한국에 보내고 일자리까지 찾아주었습니다. 리성일 총재가 오는 날이면 온 마을의 경사날이지요.》
고향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렇듯 뜨겁고 진지하다. 모교인 챈궈러스현3중에 20만원의 기금을 세워 우수교원과 우수학생을 장려하고 빈곤학생을 부조하고있는가 하면 100만원을 기증하여 새 교수청사를 지었다. 길림성의 소수민족빈곤학생부축 등에 사회공익활동에만 700만원을 내놓았다.
그 향토애가 《선남하 후북상( 先南下后北上)》의 창거를 낳았다. 신태양그룹의 새로운 주먹제품인 AC2 콜타르재생기 항목을 개발해서 선뜻 장춘고신개발구에 세워놓았다. 이곳의 투자여건이 여러 가지로 다듬어지지 못하고있지만 남방연해에서 그동안 고심스레 닦아온 귀중한 창업경험과 재부를 고향의 건설에 한몫으로 바치려는 생각에서였다.
리성일은 현재 전국정협위원, 광동성공상련합회 집행위원, 동북사범대학 공상관리학원 객원교수, 연변대학 객원교수, 무한과학기술대학 객원교수를 맞고 있다.
1999년 9월 리성일은 《전국 민족단결모범》으로 당선되여 인민대회당에서 강택민주석, 리붕위위원장, 주용기총리 등 당과 국가의 주요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99년 10월 리성일은국경 50주년경축대회 천안문관례대에 오른 광동성 6명 모범대표의 한사람으로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과 함께 천안문성루에 올라 성대한 열병식을 보는 영광을 지녔다. 그는 자기의 두눈으로 이 력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1998년부터 광동성정협위원으로 그후 전국 정협위원으로 된 리성일은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정치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민영경제발전을 다그치고 민간투자를 자극하는 근본방법》 등 제안들을 륙속 제기하여 민간자본과 민영기업을 활성화하며 정부에서 법률적 수단으로 민영경제의 리익을 보장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 의무교육시간을 12년으로 늘여 인재자원 개발, 취업압력 감소, 국민소질제고를 목적하는 의안도 제기하였다. 깊은 조사연구와 실천, 탐구를 거친 그의 제안들은 정부의 높은 중시를 받았다.